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상 파괴주의 (문단 편집) === 2차 성상 파괴운동 === [[파일:Clasm_Chludov (1).jpg]] 이리니의 반동 정책 이후, 성상 파괴 운동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를 축출한 [[니키포로스 1세]]도 성상을 옹호했으며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탄압했다. 그런데 811년 7월 24일, 니키포로스는 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패해 전사하고 그의 두개골이 불가리아의 왕 [[크룸]]의 술잔으로 쓰이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크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레온 5세]]는 우선 크룸을 물리친 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이 모든 게 성상을 옹호했기 때문이라며]] 성상 파괴 운동을 재개했다. 사실 이리니의 치세 때에도 동방의 병사들은 성상 파괴주의에 공감했고 자신들이 당한 재난을 성상 숭배와 연관지었다. 또한 수도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은 성상 파괴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노병들은 813년 6월에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석관 앞에서 제국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지켜본 레온 5세는 대대적인 성상 파괴 운동을 벌임으로서 국민들을 결집시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해 파괴 운동을 재개했다. 레온 5세는 [[성직자]], [[수도자]] 및 원로원 의원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성상 파괴를 부활시킬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한 고문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상을 사용하고 공경한 모든 황제는 반란으로 축출되거나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성상을 공경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자연사했고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으며, 사도 성당에서 황제 무덤에 있는 모든 영예와 함께 안식에 들었다. 레온 5세는 814년 6월에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문헌에서 성상 파괴를 옹호하는 증거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위원회는 6개월에 걸쳐 증거를 물색한 뒤 12월 초에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에 황제는 726년에 레온 3세가 철거했다가 이리니가 다시 복원했던 칼케 대문 위의 대형 그리스도상을 철거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레온 3세가 병사들을 보내 철거했다가 격렬한 반발을 샀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이 거기에 가서 소요를 일으키며 성상에 저주의 말을 퍼붓고 돌을 던지게 한 뒤, 자신이 우연을 가장해 현장에 가서 성상을 보호하고 신성 모독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성상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815년 1월, 황제는 성상 옹호론자인 니키포로스 세계총대주교를 소환했다. 이때 세계총대주교와 함께 황제를 만나러 간 스투디움의 대수도원장 테오도로스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항거했다. >"교회의 일은 성직자에게 맡겨 두고, 폐하께서는 국정과 군대에만 신경을 쓰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신앙을 침해하려 한다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우리를 설득한다 해도 우리는 그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의 말은 더욱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세계총대주교를 비롯한 모든 성상 옹호론자들이 공공장소나 개인 주택에서 일체의 집회를 여는 것을 금지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니키포로스를 가택에 연금시켰다. 그 후 황제는 니키포로스 세계총대주교를 유배보낸 뒤 콘스탄티노스 5세의 친척 테오도토스 카시테라스를 임명했다. 그후 벌어진 일련의 교회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레오와 콘스탄티노스 시대의 교회회의가 옳다고 결론내리고 성상 공경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다만 레온 5세는 성상 옹호론자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단지 목소리가 큰 사람들만 본보기로 처벌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반달리즘|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들의 그림이 수놓인 옷을 갈기갈기 찢고 발로 짓밟았으며 그림이 그려진 나무판에 오물을 묻히고 도끼로 쪼개 광장에서 불태웠다. 이로 인해 많은 예술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